평.길.만 강화
여행지 소개
광성보는 강화해협을 지키는 중요한 요새로, 강화 12진보의 하나입니다.
고려가 몽골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강화도로 천도한 후에 돌과 흙을 섞어 해협을 따라 길게 쌓은 성입니다. 조선시대에 다시 고쳐 쌓으면서 숙종 때(1679)석성으로 축조하였습니다. 광성보는 1871년 신미양요 때 가장 치열했던 격전지입니다. 이곳 전투에서 어재연 장군을 비롯한 조선군은 열악한 무기와 병력으로 끝까지 싸웠으며, 포로가 되지 않으려 바다에 몸을 던졌습니다. 몇 명의 중상자를 제외하고 전원이 순국한 전투였습니다.(1976년 복원되었습니다.)
쌍충비는 조선 고종 8년(1871) 신미양요 때 광성보에서 어재연 장군과 그의 아우 어재순 등 조선군이 열세한 병기로 미국 아세아함대의 해군과 백병전을 벌여 모두 장렬히 순국하자 나라 위한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 입니다. 쌍충비각 옆으로는 신미양요 때 순국한 무명용사의 비가 서 있습니다.
강화전쟁박물관에 가면 수(帥)가 쓰여진 커다란 장군기를 볼 수있습니다.(원본은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중) 강화도를 수비하던 어재연 장군이 사용한 군기로 미군에 의해 전리품으로 강탈된 후 136년 만에 2007년 장기 대여의 방식으로 조국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어재연 장군은 조선 후기의 무장으로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때 강화도 앞바다에 침입한 프랑스와 미국에 맞서 싸워 나라를 지킨 장군입니다. 기록에는 어재연장군은 칼이 부러지자 납으로 된 탄환을 던져 끝까지 싸우다 전사했다고 합니다.
광성보 안해루를 들어서 펼쳐진 물길이 강화해협입니다.
건너 보이는 김포시와 이 곳 강화군 사이의 바다를 말합니다. 강처럼 폭이 넓지 않기 (좁으면 2~300m, 넓으면 1km, 길이는 20km)에 염하라고 불리기도 하였습니다. 북쪽 으로는 한강과 임진강, 예성강의 강물이 흘러 들어 오는데,(북쪽의 월곶과 남쪽의 황산도 사이의 해수면 높이차가 커) 물살이 빠릅니다. 오랜 세월 동안 외세를 막는 군사 요충지 였습니다. 또한 강화해협은 예로부터 우리나라 해상교통의 요충지로, 조선시대에 삼남지방에서 서해를 북상해 온 세곡선(나라에 바치는 곡식을 실어나르던 배)이 염하를 통해 한강으로 진입하여 한양으로 들어갔다 합니다.
이곳은 조선 고종 8년(1871) 신미양요 때 광성보 일대에서 미해군과 격전하다가 전사한 용사들의 묘가 있는 곳입니다. 당시 어재연 장군과 아우 재순을 비롯한 군관, 사졸 53인의 전사자 중, 어재연 형제는 고향인 충북 음성군 대소면 성본리에 안장하고, 남은 군졸 51인은 신원을 분별할 수 없어 7기의 분묘에 합장하여 이 곳에서 그 순절을 기리고 있습니다.
당시 미군 기록에 의하면 광성보 전투에서 조선의 군사들은 항복을 몰랐고, 무기가 부러 지거나 총탄이 떨어지면 맨손으로 싸우거나 돌이나 흙을 집어던지며 저항했다고 합니다.
이 땅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수많은 무명의 용사들을 잊지 말아야 겠습니다.